얼마전 배우 이순재가 매니저 갑질 논란에 휘말렸다. 매니저에게 정식 업무 외에 허스렛일을 시키고, 아내의 집안일도 시켰다는 논란이다. 이순재가 오랜 시간 연예계에서 활동하면서도 특별한 논란을 일으키지 않은데다 평소 성품이 좋기로 유명하기에 매니저 갑질 논란에 대해 의외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매니저는 시중 드는 사람?
연예계 반응은 "이순재가 달라진 노동 환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이 같은 일이 벌어진 듯하다"라는 것이었다. 이순재는 1950년대에 데뷔했다. 이순재의 연예계 활동사가 곧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시간 매니저와 함께 한 그이기 때문에 '매니저' 직능에 대한 노동 형태의 변화를 빨리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란 얘기다. 게다가 노동자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최근 들어 급격히 변화했기 때문에 80대인 이순재가 이를 제대로 인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먼 옛날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예계에서 매니저는 개인 비서의 개념이 강했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가방 모찌'라는 폄하의 표현까지 들었던 매니저들이다. 가방이나 들어주면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개념이다.
특히 이런 비서 개념의 매니저 형태는 가수보다 배우 매니저들 사이에서 흔하다. 이는 가수와 배우의 태생과 업무 형태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가수는 회사, 혹은 매니저가 발굴해 데뷔를 시킨다. 매니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작곡가, 작사가, 음반 제작사, PD, 공연 제작자 등 업계 네트워킹을 활용해 가수를 데뷔시키고 활동을 진두지휘한다. 이렇게 데뷔한 가수가 인기가 떨어지면 제작자는 또 다른 가수를 발굴해 데뷔시킨다. 이런 과정에서 가수와 제작자 사이에서는 제작자가 권력의 우위를 점한다.
그런데 배우의 경우 소속사 대표 등 매니지먼트사보다 배우가 권력적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는 본인에게 직접 들어오는 섭외 제안만으로도 충분히 활동이 가능하다. 이름을 알려야 하는 신인시절이 지나고, 이름값이 올라가면 힘 있는 매니저 없이도 독자적으로 활동이 가능하다. 이 때 배우가 매니저를 직접 고용하는데, 이 경우 권력은 당연히 매니저보다 배우에게 있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 미흡한데다 매니저와의 관계에서 권력적 우위를 점한 배우는 자신이 월급을 주는 매니저를 다분히 과거의 방식으로 대우한다. 업무를 돕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 전반을 돕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매니저가 집안일을 돕고 집안 청소도 하게 된다. 또 연예인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이동을 위해 운전을 하기도 한다. 인터넷 업무를 대신 봐주고 심지어 은행일도 한다.
과거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요즈음에도 연예 산업 현장에서는 계약이나 4대보험 없이 구두 계약만으로 일하는 매니저를 왕왕 볼 수 있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대중문화예술산업 실태조사’를 보면 매니지먼트사 1120곳 중에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곳은 14.3%, 4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곳은 18.3%다. 로드 매니저까지 통계를 확대하면 계약 없이 일하는 매니저는 더욱 많을 것임이 분명하다.
계약서 없이 구두 계약만으로 활동
연예인의 지인이 매니저로 활동하는 경우 계약서를 쓰지 않을 확률은 더 높다. 얼마 전 갑질 논란에 휩싸인 신현준의 경우가 그렇다. 신현준의 전 매니저인 김광섭 씨는 신현준과 친구사이였다. 당연히 계약서 없이 일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13년간 계약서도 없이 매니저로 일한 게 이상해 보이지만 그가 처음 신현준의 매니저 일을 시작했던 1994년 당시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업계에 따르면 당시 일했던 매니저 가운데에는 계약서가 있는 매니저보다 없는 매니저가 훨씬 많았다. 게다가 김씨는 신현준의 지인이기도 했다. 물론 역으로 연예인도 계약서 없이 소속사와 구두 계약만으로 활동했다. 계약의 개념 자체가 미흡했던 시대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다. 케이(K)-컬처가 전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시대에, 그리고 고용주와 고용자의 관계가 주종의 관계가 아님이 명확해진 이 시대에 '라떼는 말이야'를 얘기해선 안 된다. 변화하는 노동 환경에 엔터테인먼트 업계도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젊은 연예인들 중에서는 매니저의 업무 영역에 대해 명확히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한 유명 배우는 개인 일정에 절대 매니저를 호출하지 않는다. 심지어 공식 일정이라도 너무 늦어지면 매니저를 돌려보낸다. 이 배우는 “제작발표회, 간담회 등 공식 일정 후 진행되는 뒷풀이에 올 때 자리가 너무 길어지면 매니저를 돌려보낸다. 그리고 나는 그냥 택시를 타고 집에 온다”고 전했다. 이 배우는 “매니저를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하는 것도 불편하지만 사실 욕을 먹을까 신경 쓰여서 그러기도 한다. 매니저들에게 본인이 느끼기에 부당한 업무를 시키면 요즘에는 업계에서 말이 돈다. 웬만하면 욕을 먹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배우는 “과거에는 매니저들이 배우와 관련한 모든 일을 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지금은 매니저들도 업무 영역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 그런데 상황에서 업무 외 일이라고 느끼는 일을 시키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스스로도 업무 외의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톱 배우 역시 과거와 달라진 노동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고 전했다. 이 배우는 90년대에 데뷔해 연예인의 개인사 전반을 돌봤던 매니저들의 과거 업무 형태에 익숙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매니저에게 본인의 공식 업무가 아닌 개인적인 일이나 가족과 관련된 일을 시킬 때에는 따로 돈을 지불한다. 이 배우가 속한 회사의 관계자는 “개인적인 업무를 시키고 따로 돈을 지급하는 것 역시 정상적인 업무 지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서도 “과거 연예인의 모든 개인적 일을 매니저가 일임하던 시절의 배우라 매니저의 업무 역할을 정확히 구분 짓는 것에 어색함을 느꼈다. 이에 회사가 공적인 일 이외에 업무 지시를 내릴 때에는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내부적인 합의를 했다”고 말했다.
매니저들은 업무 시간에 대해서도 업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순재의 전 매니저는 “두 달 동안 주말을 포함해 쉰 날은 단 5일로, 평균 주 55시간 넘게 일했지만, 휴일·추가 근무 수당은 없었고 기본급 월 180만원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이순재 전 매니저뿐 아니라 다른 매니저들도 매니저들에게 업무 시간 개념이 없다는 점에 100% 동의한다. 엔터테인먼트 업의 특성상 밤낮도 없고 주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들은 “주말에 일을 하면 주중에 휴일을 주는 등 방식으로 충분히 업무 시간을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또 공과 사의 구분을 통해 스케줄을 정리할 필요도 있다”고 말한다.
매니저도 하나의 직업군으로 보호 받아야
배우 이순재는 매니저 갑질 논란 후 “이번 일을 통해 저도 함께 일하는 매니저들, 업계 관계자들이 당면한 어려움을 잘 알게 됐다. 80 평생을 연기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고충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점을 고통 속에 반성하고 있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제가 몸담고 있는 업계 종사자들의 권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 더 나아가 비슷한 어려움에 당면한 분들께도 도움이 되고 용기를 드릴 수 있는 배우가 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또 “근로시간 등에 대해서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이 제시돼 제도화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뜻도 전했다.
노동 문제와 관련한 다수의 사건을 진행한 최건 변호사는 “사회가 변화한 만큼 매니저도 하나의 직업군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럼에 있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근로계약서”라면서 “업계의 특성상 업무 영역과 업무 시간에 대한 규정을 명확히 하기 힘들더라도 추가 합의 조항 등을 통해 최대한 업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매니저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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