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728x90
반응형

 

설교 / 김운성 위임목사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오늘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지난주 설교를 잠시 상기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성장하신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던 나사렛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잘못 알았습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1절 이하의 메시아 예언을 읽으셨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요, 그 자신도 목수인 예 수로만 생각했기에 당신을 메시아라고 하시는 예수님께 분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오해한 것은 나사렛 사람만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이 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자 선생이라 부르고, 심오한 가르침에 놀라 랍비라 부르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자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 구원자, 주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은 올바른 예수님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 열심이라 해도 예수님을 선생님, 랍비, 선지자 정도로만 생각하면 그 열심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사순절에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계셨는데, 집안에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그중에는 갈릴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째 데리고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기와를 벗기 고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이들은 대단했습니다. 우선 병자에 대한 사랑이 대단합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다면 침상 데리고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열정이 대단해 서 병자를 침상째 데리고 왔고, 기와를 벗기기까지 했으니 대단합니다. 또 이들의 믿음도 훌륭합니다. 예수님께 가면 반드시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에 온 것입니다. 본문 20절 앞부분은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이들은 예수님을 병을 고치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중풍병자를 데려가면 고 침을 받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여기서 "능력이란 단어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능력은 헬라어 "뒤나미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뒤나미스는 힘,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에서 "다이너마이트가 유래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는 바위를 깨뜨리는 힘을 가진 폭탄입니다.

 

 

그런데 능력은 특정인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구든지 다이너마이트를 가질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꼭 힘센 남자가 가져야만 다이너마이트가 위력 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초등학생도 다이너마이트를 가지면 힘이 생기고, 다이너마이트는 어린아이가 던져도 폭발합니다. 누구라도 다이너마이트를 가지면 힘이 생깁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 "권능"이라 번역된 단어가 "뒤나미스입니다. 성 령님이 임하시면 그 누구나 뒤나미스, 권능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집안, 학벌, 신분과 지위가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갈릴리의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락방에서 오로지 기도에 힘쓰다가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시고, 권능을 얻게 되었을 때, 오순절 순례자 앞에서 당당하게 능력의 말씀을 전했고,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 장애인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아니, 저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일을 하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성령님 안에 있어서 뒤나미스를 받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에 충만하여 권능, 뒤나미스를 얻길 원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시다. 중풍병자가 도착했고, 예수님께는 능력이 있었으니, 이제 그를 치유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 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긴장이 흘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분노했습니다. 21절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은 "하나님만 죄를 사할 수 있는데, 저 예수가 감히 죄 사함을 운운하다니라며 분노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신다는 이들의 생각은 정확히 맞습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리고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22~23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 어느 것이 쉬울까요? 사람에게는 둘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병의 치유가 더 쉽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바리새인들도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처럼 하나님만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건 사람에게는 어려운 정도를 넘어서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 불가능한 일, 죄를 사하는 일을 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24절 앞부분을 보세요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아멘.

 

여기 주목할 또 하나의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권세입니다.

권세는 앞 에서 살펴본 능력, 뒤나미스와 다릅니다. "권세"엑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엑수시아란 권한, 자격으로서 신분에서 오는 힘을 말합니다. 엑시아는 앞에서 언급한 뒤나미스, 즉 능력과 다릅니다.

뒤나미스는 누구나 가질 수 있기에, 초등학생이라도 다이너마이트를 가질 수도 있고, 터뜨릴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이 함께하시자 제자들도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고, 성 전 미문의 앉은뱅이 장애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능력, 뒤나미스를 가졌다고 해서 엑수시아, 권세까지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건 특별한 신분의 존재에게만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닭 한 마리 잡을 힘이 없는 작고 병약한 여성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녀는 연약합니다. 무거운 것을 들 수도 없고,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뒤나미스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대통령이라는 신분 때문에 엑수시아, 권세가 있습니다. 그녀가 명령하면 군대가 출동하고, 미사일을 발사합니다. 그러나 그녀 옆의 비서는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세도 그의 명령에는 군대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 권세는 대통령이란 신분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대로 오직 하나님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 권세, 엑수시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나님" 이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하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칠 줄 믿고 데리고 왔 더니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고치신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은 그 들 앞에 앉아 계셨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아들이라 불리면서 사람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그 후 에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기도 하셨지요. 24절 후반부에 보면 중풍병자에 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죄 사함을 먼저 주시고, 그 후에 병도 고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늘 예수님을 부르고 믿습니다. 그분께 나옵니다. 무엇을 기대하며 나옵니까? 그저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 병을 고치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나요? 이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경배하고, 찬양하러 옵니다. 그리고 세상 그 누 구도 할 수 없는 것,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사망에서 건지고, 사탄의 손에서 구원 하시는 은혜를 얻으려고 옵니다.

 

병 고침을 받는 것도 구원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구원일뿐입니다. 병 고침을 수십 번 받아도 그는 결국 죽습니다. 멸망합니다.

 

영원한 생명 의 구원은 오직 죄 사함으로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하십니다. 설령 질병이 낫지 않아도,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영생을 얻어, 궁극의 구원을 얻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 예수님께 이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길 원합니다.

728x90
반응형